1. 의화단운동

의화단운동은 1900년 화북일대에서 일어난 배외적 농민 투쟁이다. 하지만 과연 진정한 운동인지 아니면 그저 폭동인지 규정할 필요가 있다. 의화단 운동은 전국 각지의 무력단체 '권'이 자위의용단체인 '단'으로 변화하고 기독교 반대투쟁을 벌이며 전개되었다.

 

반기독교운동에서 각종 테러, 충돌 등의 사건을 교안이라고 부른다. 교안은 1848년 처음 나타났고, 이후 계속해서 교안이 끊임없이 발생했다. 특히 1858년 텐진조약이 체결되고 이어 베이징조약이 체결되어 기독교의 중국내지 포교 자유가 인정되면서 본격화되었다. 이전에는 포교가 불법이었으나 조약체결 이후 합법화되었기 때문이다. 교안은 서양 기독교선교사, 외교관, 중국인신자, 일부 중국 관리와 하층민 중심의 중국 민중, 비밀결사조직 간의 갈등이다. 당시 중국인은 배타적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기독교는 외래종교로서 교회설립, 포교활동을 하면서 토착신앙 및 유교, 불교와 갈등을 야기했다. 특히 공자의 고향이었던 산동지역이 가장 과격화하는 모습을 보였다. 또한 교당을 짓는 과정에서 사전 양해 없이 무작정 들어왔고, 교당은 치외법권 지역이라 죄를 짓고 도망친 자들의 도피처 역할을 했으며, 신자와 토착민의 여러 분쟁 시에 선교사가 신자에게 도움을 주면서 토착민의 불만을 증가시켰다. 한편, 자연재해 발생으로 이재민이 속출했고, 서양 상품의 유입으로 토산물 경쟁력이 떨어지고 실업자가 폭증했다. 이렇든 교안은 여러가지 문제가 혼합되면서 그 불만이 서양으로 집중되며 일어나게 되었다.

 

교안의 발생은 단순 테러나 충돌을 넘어서 국가적 차원의 문제로 확산되었다. 1897년 독일 신부2명이 비밀결사단체인 대도회 회원에게 살해되면서, 그것을 계기로 독일이 교주만을 점령했고 청조 정부는 배상금 22만냥과 철도부설권을 지불했다. 이후 교안은 전국 각지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전개되었다. 1898년 관현에서 교당설립을 위해 민간신앙 사묘를 파괴하자 민중들의 요청으로 대도회, 매화권, 신권회 등의 비밀결사단체가 '조청멸양'의 구호를 내걸고 교안을 전개했다. 이때 비밀결사단체들은 이름을 의화권으로 통일해서 사용했다. 이는 진짜 명칭을 사용하면 정체가 탄로 날까 우려했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무술조직을 뜻하는 의화권에서 자위의용단체인 의화단으로 명칭이 변모되었다. 본래 비밀결사조직은 청에 대한 반발로 형성되었으나, 서양에 대한 불만이 커지조 오히려 청을 도와서 서양을 물리치고자 하는 움직임으로 변화했다. 그에 따라 구호도 '반청복명'에서 '순청멸양', '부청멸양'으로 변화했다. 그러나 이러한 움직임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청 조정은 폭도라는 인식을 계속 가져 교안이 발생하면 발생지마다 지방관을 처벌 및 교체했다. 

 

본래 지방관들은 교안에 대해 중립적이고 민중에게 호의적인 느낌을 일부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1900년 원세개가 산동순무에 부임하면서 신건육군을 동원해 의화단 운동을 강력하게 진압했다. 의화단 세력은 산동에서 벗어나 다른 곳으로 이동해야했다. 당시 양자강 하류에는 장지동, 유곤일, 좌종당 등 한인 총독이 서양과 '동남호보협정'을 체결하여 서양세력이 강했다. 따라서 의화단은 천진, 북경으로 이동해야했다. 4~5월 경 이동하면서 영사관, 교당을 습격하며 급속하게 세력을 확장했다. 북경과 가까워지자 서태후는 의화단에 위협을 느끼고 합법적인 조직으로 인정하여 각종 지원을 실시했다. 이는 의화단의 불만을 서양에게 모두 돌리면서 의화단으로 하여금 서양열강을 견제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의화단은 공식적인 의용군이 되어 세력을 점점 키웠고 서양은 청조 정부에 진압을 요청했다. 그러나 청조 정부는 소극적인 움직임을 보였다. 의화단이 천진, 북경 시내에서 교안을 전개하며 서양 공사당 습격 등을 감행함에도 청조의 대응이 없자, 8월 8개국 연합군이 북경에 침입했다. 당시 의화단원들은 대부분 10~20대로 이루어졌고, 손오공, 삼국지연의 등을 보고 자신이 도술을 쓸 수 있다고 생각하여 무작정 공격했고 학살의 양면으로 전쟁이 전개되었다. 의화단이 진압되자 서태후는 서안으로 도주했고, 의화단 운동은 실패로 끝났다. 이후 신축조약이 체결되고 서태후는 천조신정을 단행했다.

 

1901년 신축조약, 즉 베이징의정서가 체결되었다. 그 내용으로는 첫째, 북경에 외국 공사당 설치 둘째, 천진의 대고포대 철폐 셋째, 9억 8천만 냥 배상금 지불 넷째, 서양열강의 공사 살해 등에 대한 사죄 다섯째, 총리각국사무아문폐지와 외무부 설치 여섯째, 천진/북경에 외국 군대 주둔허용이다. 서태후는 서안으로 도주해서 청조신정을 단행했다. 그 내용으로는 는 첫째, 정치 및 관제의 근대적 기구 전환 둘째, 법제개혁으로 입헌군주제 지향 셋째, 군사의 근대화 넷째, 농본주의 탈피 및 실업의 장려 다섯째 교육제도 개편, 과거제 폐지, 신식학당 설립이다.

 

의화단운동의 결과로 서태후 정권은 이전 변법파가 실시하고자 한 내용의 신정을 단행했다. 그러나 이 개혁은 제대로 실시되지 않고 그저 정권 존속을 위한 기만책에 불과했다. 배상금 등은 오히려 농민에게 징수함으로 농민의 삶은 더 힘겨워지게 되었다. 즉, 의화단운동으로 인한 긍정적 영향이 거의 없다. 폭동의 성격이 굉장히 강하며 운동이라 일컫기에 의문점을 상당히 가진다.

 

 

 

  • 네이버 블러그 공유하기
  • 네이버 밴드에 공유하기
  • 페이스북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